인문학, 사람을 읽다1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인문학, 사람을 읽다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iotr, Ilyitch Tchaikovsky)
writer 박창수
후원의 행운 뒤에 동성애 고통 안고 산
낭만주의 대작곡가
14년 간 조건 없는 후원을 자청한 미망인 폰 메크와의 인연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내 삶의 가장 큰 선물이죠. 나를 그 사람의 정부(情婦)쯤으로 본다면 그건 말도 안될 얘기라구요. 난 그의 육체가 아니라 그의 음악을 사랑하죠. 그를 위해서 쓰는 돈은 아깝지가 않아요.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탄생시키는 데 한몫을 거들 수 있으니까요”
19세기 후반 무려 14년 동안 지속적으로 한 작곡가에게 거액의 생활비를 보내준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제시다 폰 메크((Nadjeshda von Meck)의 당시 입장이 이랬다. 그녀의 조건 없는 후원이 없었다면 낭만주의 대작곡가 차이콥스키(1840-1893)의 교향곡들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iotr, Ilyitch Tchaikovsky)! 53세의 이른 나이로 죽기 전까지 그의 중년인생은 불행과 행운을 동시에 안고 산 시기였다. 매월마다 생활과 작곡에 필요한 활동비를 지원해준 폰 메크는 그에겐 행운의 여신이나 다름없었다.
폰 메크의 후원은 당시 러시의 시대상과 직결된다. 차이콥스키가 활동하던 시대의 러시아에서는 귀족이나 부자들이 예술활동을 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일이 매우 명예로운 일로 예술가들이 명성을 얻으면 그 못지않게 후원자들에게도 유명세가 뒤따랐다.
남편이 사망한 후 우울함에 빠져있을 때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에 심취하기 시작했던 폰메크는 이런 유능한 인재는 인류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매년 6천 루불의 지원키로 했다. 단 그녀는 후원을 함에 있어서 단서를 붙였다. 편지는 주고 받을 수 있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절대 안된다는 것.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거부의 미망인은 열 두 자녀들이 있었고 그녀를 지켜보는 가문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마음속으로는 연정을 품는다고 할지라도 이를 자제한다는 쪽이었다. 나름 자기관리를 위한 철저한 계산을 한 셈이다. 실제로 차이콥스키와 폰메크는 1876년부터 14년 간 인연을 이어갔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은 이 기간 동안 천 여 통이 넘는 편지를 서로 주고받고 했을 뿐이다. 폰 메크의 후원은 가난뱅이 작곡가 차이콥스키에게 안정된 작곡 활동을 할 수 있게 했고 이로 인해 그는 ‘백조의 호수’를 비롯한 수많은 명곡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동성애로 발목 잡힌 작곡가의 인생일대 실수는 악녀와의 결혼
폰 메크가 행운의 여신이었다면 평생 암덩어리가 같은 존재가 되어 차이콥스키를 힘들게 한 악녀가 바로 안토니나 밀류코바다. 20대 중반시절부터 음악원 교수로서 후학양성과 작곡활동을 병행해오던 차이콥스키는 30대 중반이 되도록 미혼이었다. 여기에는 첫 사랑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다시 사랑을 하지 못한 심리적요인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성적으로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었다.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그 시대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허용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의 동성애 소문은 암암리에 나돌고 있었다. 한참 잘 나가는 작곡가에게는 앞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일이었기에 당사자로서는 엄청난 고민이자 시련이었다. 이때 마침 제자였던 밀류코바는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면서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겠다는 극단적인 자세로 달려들었다. 차이콥스키로서는 그녀와의 결혼이 대외적으로 동성애의 불씨를 가라앉힐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처럼 결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로 남았다. 애정없는 결혼인데다 성적으로 불협화음이 뻔한 일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밀류코바는 잠자리를 기피하는 차이콥스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괴롭혔고 자책감에 빠진 차이콥스키는 호수에 몸을 던지는 자살소통까지 벌인다. 그 후 그녀로부터 몸은 자유로워졌지만 경제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줘야 하는 입장이 된다. 더욱이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 자녀를 낳고 살면서도 법적 부부라는 이유를 내세워 차이콥스키를 협박하면서 돈을 뜯어갔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그의 음악도 삶도 일찌감치 막을 내렸을지 모른다.
죽음의 원인이 콜레라가 아닌 강요에 의한 자살(?)이라고
1893년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창의 첫무대를 가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차이콥스키는 세상과 작별한다. 당시 그의 죽음은 모스크바에 콜레라가 유행하던 시기였던 만큼 콜레라로 알려졌고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폰메크 부인의 후원이 끊긴 이후 외로움과 비참함을 견디지 못해 괴로워하다 자살했다는 설도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닌 자살을 강요하는 부류의 강압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음악공부를 한 그였지만 부친의 뜻에 의해 법률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엔 법무성의 서기로 근무했다. 하지만 끝내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음악원에 들어가 공부를 했고 음악가로서는 성공을 거둔 케이스다. 문제는 동성애가 그의 삶 내내 주홍글씨처럼 따라 다녔다. 밀류코바와의 악연이 그러했고 폰 메크 부인의 후원 중단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어서 그가 한 귀족의 청년과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법률학교 동창생인 고위관료들로부터 자살을 강요받아 치사량의 약물을 마시고 죽었다는 얘기다.
불행과 행운을 함께 안고 작곡 활동에 열정을 바친 차이콥스키. 그는 작곡가로서 유럽 음악의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을 취했기에 민족적인 러시아 음악풍과 서유럽 음악풍을 잘 절충한 작곡가였다는 평가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백조의 호수, 에프게니 오네긴, 바이올린 협주곡,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비창 등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킨 러시아 교향곡의 아버지였지만 그의 삶은 햇살과 비바람이 늘 상존하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 Story in story 교향곡 6번 비창
1893년 완성하여 직접 지휘봉을 들고 초연을 한 후 차이콥스키는 열흘도 안돼 생을 마감한다.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은 폰 메크 부인과의 갑작스런 단절 이후 그의 처절하고 비통한 심정을 담은 작품이다. 유년시절 어머니를 잃고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여성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차이콥스키에게 후원자 폰 베크 부인은 육체적 관계의 연인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가장 큰 의지의 존재였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작곡가의 비탄과 번민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