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사람을 읽다 - 3.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인문학 사람을 읽다 -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한 쪽 다리 없이도 19세기 유럽을 홀린
연극무대의 영원한 히로인
글 박창수 전문기자
유럽 연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배우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줄거리에 들어 있는 역사와 시대적 배경을 공부해야 하며 그 작품을 쓴 작가의 의도를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
78세였던 1923년 어느 날 영화 촬영 도중 쓰러져 사망한 프랑스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평소 자주 했던 말이다. 무대 위 프로정신이 투철했던 그녀의 이 말은 연기자 후배들에게 영원한 멘토가 되었다.
사라는 프랑스의 연극 배우였지만 유럽과 미국에서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여자 배우로 평가받았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그녀의 연기를 본 사람이라면 ‘천생 배우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무대 위에서 그녀가 보여준 몸부림과 타고난 끼는 추종을 불허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연기를 하던 중 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감정이 격한 장면에서 그만 기절을 하여 쓰러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배역에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길래 그랬던 것일까? 80을 눈 앞에 둔 나이에도 배우로서의 열정을 불살랐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사실 60대 이후 그녀는 여배우로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핸디캡일 수밖에 없는 신체적 문제까지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최고의 배우로 거듭났다는 점이 많은이들의 시선을 주목시킨다.
명성이 자자했던 1905년 이었다. 그녀에게는 인생 일대 가장 큰 불운이 찾아온다. 공연 중간에 다리 부상을 입었는데도 공연은 계속 이어갔지만 안타깝게도 상처는 악화되어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연극무대에 서는 여배우에게 한쪽 다리가 없다는 것은 치명타가 아닐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대에 올랐다. 혼신을 다해 자신이 맡은 배역을 소화해내는 연기력이 남달랐던 것이다.
혹자는 불구의 몸으로 지속적인 연기활동을 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느냐고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매 작품마다 배역 자체가 특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이다. 여기에는 숨은 비밀이 있었다. 그녀의 연기력을 인정하고 사랑한 극작가들의 손이다. 무대위를 달구는 사라의 연기력에 반한 극작가들은 그녀가 앉아서도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했던 것이다.
연기만이 아니라 연극에 대한 여러권의 책을 쓰기도 했고 영화 역사 초창기에 등장한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한 그녀는 1914년 프랑스 정부가 주는 ‘레지옹 도뇌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생아로 태어나 질풍노도 같았던 젊은날의 상흔을 간책했던 여인
사라 베르나르가 무대 위의 여신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타고난 신체적 매력과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넘치는 끼 그리고 변함없이 한 길만을 고집한 연기 열정이다. 사실 그녀는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불운을 겪이 훨씬 이전에 여배우로서 성공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요인들이 여럿 있었다. 출생의 비밀과 젊은 날 그녀를 흔들리게 하던 상흔들이 그렇다.
사라는 1844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줄리 베르나르는 고급창녀였고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사생아였다. 줄리는 그녀를 파리 데클레마숑에 있는 음악 학교에 입학시켰고 이어서 18세이던 1862년에는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 Française)의 학생이 된다. 이것이 연기 경력을 쌓기 시작한 배경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무대 위의 그녀는 연기력도 인성도 낙제점이었다. 데뷔 무대인 라신의 비극 ‘이피제니’ 에서는 무대공포증으로 연기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다혈질의 성격은 사람들과 부딪혔다. 고위층을 후원자로 둔 어머니 때문에 프랑세즈 문지기로부터 매춘부의 딸임을 의미하는 ‘작은 베르나르’라는 놀림을 받자 우선으로 머리를 후려치기도 했고 극장 행사에 찾아온 여동생이 프랑세즈 주역배우였던 마담 나탈리와 시비가 일어나자 그만 나탈리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연기력도 형편없는데다 싸움까지 했으니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퇴학뿐이었다. 그 후 벨기에로 넘어가 그곳에서 귀족 리뉴 공 앙리의 정부가 되어 아들 마우리스를 출산하지만 그녀가 원했던 결혼은 앙리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물거품이 돼 버린다. 결국 앙리와 이별한 다시 파리도 돌아온 그녀는 한동안 엄마처럼 고급 창녀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프랑스 사회와 문화가 개인의 사생활에 지나친 편견의 잣대를 들이댔다면 그녀의 연기 생활은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끝이 났을 일이다. 또 그녀가 남의 눈치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더라면 마찬가지로 무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터이다. 누군가는 그녀의 뒤에서 ‘사생아’ ‘다혈질의 여자’ ‘미혼모’라며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타고난 자유분방함과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사라에게는 그런 과거들이 장애물이 될 수가 없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탄탄한 연기력을 쌓은 천생 배우였던 무대의 여신
스믈 두살이던 1866년 사라는 세아트르 데 로데오(Théâtre de L’Odéon)에서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10대 후반 학창시절의 사건, 출산, 이혼 등은 새롭게 연기에 임하는 그녀에게 열정과 성숙미를 심어주면서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그래서일까? 4년째 차근차근 연기력을 다지던 1869년 사라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 다름 아닌 젊은 극작가 프랑수아 코페의 1막 시극‘통행인 Le Passant’에서 음유시인 자네토 역을 맡음으로써 대 성공을 거두었고 이로 인해 나폴레옹 3세 앞에서도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그 무렵 일어난 보불 전쟁은 잠시 연극계에도 타격을 주었다. 무대 공연이 중단되고 극장은 병원으로 바뀌었다. 이때 사라는 부상병을 간호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녀의 연기 인생은 다시 시작됐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로 유명세가 더해졌고 뉴욕까지 이름을 알렸다. ‘루이 브라스’ ,‘에르나니’, ‘토스카’, ‘테도라’, ‘춘희’, ‘햄릿’, ‘다니엘’, ‘라 글로아르’, ‘레진 아르망’ 등은 그녀의 대표작품들로 거론된다. 이중에서도 공연시간이 4시간에 이르는 연극 ‘햄릿’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햄릿을 연기함으로써 ‘여신 사라’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를 비롯해 앤디 워홀(Andy Warhol), 조반니 볼디니(Giovanni Boldini) 등 화가들의 캔버스에 화려하면서도 극적인 자태로 남은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이자 요염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무대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연출했던 그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끼를 맘껏 발산하면 살았던 여인이다.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거리의 매춘부나 무대의 배우에게만 허락되던 그 시절 공공장소에서도 과감하게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면서 보는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가 하면 새틴으로 수놓은 관을 순회공연에 가지고 다니며 그 곳에서 낮잠을 즐겼고 토끼털 코트만 걸친채 한밤중 마차를 타고 파리 시내를 질주했다. 그녀에게는 일상도 무대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