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황금인생>12_대도도금 정광미 대표
빌딩숲 한 가운데서 빛나는
도금공장 만든
뿌리산업의 匠人
서울 도심 빌딩숲 한 가운데 큰 규모의 도금공장이 있다. 국내외 다수 브랜드의 금속 액세서리 도금 작업을 도맡아오는가 하면 자사 브랜드까지 탄생시키며 한국 뿌리 산업 중 하나인 표면처리업계 선도주자로 불리는 대도도금이다. 형제인 정광수 정광미 공동대표가 이끄는 회사로 생산기술과 내부 관리를 책임지는 정광미 대표는 명장 출신. 지난 40여 년 간 쌓아온 도금 기술과 노하우를 신사옥 내 스마트공장으로 옮겨놓은 화제의 CEO다.
글_박창수 기자,
서울 성동구 성수동1가에 자리한 대도금속 로비에는 특별한 현판이 걸려있다. ‘무니켈도금 안전생산 인증업체’. KOTITI시험연구원이 구축한 ‘금속장신구 알레르기 안전인증’을 받은 사업장으로 국내 도금 전문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지난 6월30일에 획득했다, 국내 도금기술 선도기업 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검증받은 셈이다.
대도도금은 지난 1999년 5월 정광수 정광미 공동대표가 함께 설립한 장식, 귀금속 도금 전문업체다. 도금업 현장에서 40여 년간 몸담아온 공동대표가 이끄는 서울 소재 도금업계 대표 회사로 형제 CEO는 2013년 ‘세종콜렉션’이라는 액세서리 제조 브랜드를 만들어 자회사로 출범시켰는가 하면 최근엔 자체 가방 브랜드인 ‘faf(파프)도 론칭했다.
도금명장으로 거듭난 정광미 대표가 생산기술을 전담해온 회사인 만큼 사업초기부터 국내외 유명 브랜드 액세서리 도금 작업을 주도해오면서 도금 기술을 발전시켜온 산증인이다. 전기도금, 이온도금, 전착코팅 등은 대도도금의 핵심기술로 정평이 나 있고 수지재활용 코팅장치, 피도금체 건조용 스팀 탈수기, 금속표면 칼라패턴 형성방법 등의 특허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10여년 전부터는 도금 임가공 서비스 비중을 낮추고 대신 다양한 소재 가공, 조립 및 포장 설비와 인력 확보로 완제품 자체 생산 비중을 높혔다.
지난 1월 기존의 사업장 부지에 신사옥을 완공한 이 회사는 빌딩형 사옥 내에 스마트 도금공장을 구축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외 관련 기업들로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한 도심형 도금공장이자 금속장신구 분야에서는 해외에도 동일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화두다. 무엇보다도 이 도금공장 구상과 설비 설계를 정광미 대표가 직접 했다는 점에서 역시 명장의 능력은 다르다는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고2 중퇴 아픔을 톡톡히 보상한 이름 ‘명장’
정광미 대표는 재료 분야에서 도장을 포함한 표면처리직종의 명장 7명 중 한 사람이다. 지난 2015년 8월 그는 이 분야 네 번째의 명장이자 가방 부자재 등의 장식과 귀금속을 아우르는 도금에서는 두 번째 장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도금공장에 소년공으로 첫 발을 내딛은 후 33년 만에 얻은 특별한 훈장이었다. 명장으로 선정되던 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어머니였다.
고향 경남 사천에서 성남의 도금공장으로 올라올 때 18세였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소년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8남매를 홀로 키우던 여인의 넷째 아들이었다. 부산 광복동 시장에서노점상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근근이 해결해주던 어머님을 차마 더 이상은 볼 수 없어서 학교를 중퇴하고 그 무렵 큰형이 일하던 성남시 소재 동광금속에 취직했다. 직원 수 다섯 명 밖에 안 되는 열악한 도금공장에서 오직 수공으로 연마, 세척, 도금, 코팅을 이어가는 전체 공정을 배웠다, 20여 년 경력을 쌓은 후 함께 일하던 바로 위의 형 정광수 대표와 함께 지금의 회사를 창업했다. 대표가 된 후에도 여전히 생산현장을 벗어나지 않고 도금실무와 R&D에만 주력해온 그였다,
“어머님이 학교는 마쳐야 된다고 만류하셨지만 저로서는 그게 최선의 길이었어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명장이 된 순간 못 배우면 사람 구실 못한다고 걱정하던 당신께 뒤늦게나마 보답을 한 것 같았어요”
명장이 되려면 최소 15년 이상의 현장경력은 필수이고 기능장 시험 합격과 우수숙련기술인 선정에 이어 명장심사를 거쳐야 한다. 심사가 워낙 까다롭고 복잡해 50년 넘게 한길만 걸어온 장인들도 명장 도전은 아예 포기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식으로 표면처리 이론 교육을 받지 못한 그로서는 기능장 시험공부가 만만찮았다. 임가공 납품 일정을 맞춰가면서 야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독학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던 지 그 후로는 책만 보면 고개를 돌렸다.
애초부터 명장을 꿈꾼 게 아니었다. 우연한 계기에 주변에서 기능경기대회에 참여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2011년 전국표면처리경기대회에 나가 1위를 차지했다. 부상으로 표면처리 기능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때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3D업종으로 소외받던 장식, 귀금속 도금 현장인력들도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생겼다. 현장 경력과 기술력은 이미 넘치는 수준이었던 만큼 이듬해 표면처리기능장 시험에 합격하고 우수숙련기술인으로 선정되면서 명장으로 향하는 수순을 밟았던 것.
“명장이 됐다고 해서 돈을 더 많이 벌고 어깨 세우며 다니는 것은 아니거든요. 되레 사회적 책임감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 직원들에게 같은 분야 선배로서의 본보기를 남겼다는 점에서는 뿌듯했죠.”
명장이 된 후 오히려 외주물량은 더 감소했다. 명장이 대표인 업체라는 선입견 때문에 거래처들 중엔 부담감을 갖게 된 업체들도 생긴데다 정 대표 입장에서는 품질력에 더 큰 책임감을 갖게 됐다. 임가공 거래처와 품질에 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대표’인 형제가 힘을 합해 한 길을 걷다
대도도금이 언론에 소개될 때면 공동대표인 만큼 정광수 정광미 대표가 함께 찍은 사진이 등장하곤 한다. 형제라서 플래쉬 세례를 한 번 더 받는 셈. 하지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능인일수록 개인의 고집이 남다르니 공동 경영을 한다는 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다섯 살 터울인 형과 동생이 동등한 자격과 권한을 갖고 일한다는 것 자체도 적잖게 불편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정 대표의 말은 그 반대다.
“함께 창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저 혼자서 했다면 능력도 모자라고 복잡해서 아마 못했을 겁니다. 형님이 곁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 회사가 지금까지 성장해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형님이 있으니 힘든 일이 생겨도 겁나지 않고 늘 든든했거든요”
무탈하게 잘 성장한 오늘의 대도도금이 있기까지는 전적으로 정광수 대표의 힘이 컸다며 공을 형에게로 돌린다. 물론 형 만한 아우 없다는 말도 있지만 기업경영은 이 속담 하나로 다 풀어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환경과 요인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형제에게는 나름 철저한 분업과 준칙이 있었다. 적극적이면서도 외향적인 스타일인 정광수 대표는 재무와 영업을 전담하고 내성적이면서 파고드는 성향이 강한 정광미 대표는 생산기술과 관리를 책임졌다. 또 한 가지, 배우자들의 회사 업무 관여는 철저하게 차단하기로 약속했다. 각자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책임졌고 갈등의 파장은 사전에 제거한 것이다. 공동대표 라는 이유 때문에 그간 대내외적으로 문제가 새어 나온 적이 없었다. 그 특별한 노하우는 뭘까?
“안싸운다면 그건 거짓말이죠. 우리도 의견이 서로 달라서 부딪힐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회사를 위한 논쟁이었을 뿐 감정싸움은 한 번도 없었어요. 단지 생각이 다른 것이니까요. 사실 형이 저를 이해하고 저한테 져줄 때가 많습니다, 저에게 최고의 지지자이자 최고의 선배이기도 하죠,”
논쟁과 소통을 통해 서로의 장 단점을 잘 버무려온 것이 회사 발전에는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낳았다는 게 정 대표의 설명이다. 게다가 창업 이전 18년 동안 한 직장에서 동고동락하면서 걸어왔던 만큼 서로를 잘 알기에 배려와 양보심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늘 정 대표가 입버릇처럼 내놓는 경영노하우 한 가지가 있다.
“공동대표가 경영하는 회사가 장수하려면 자기 욕심보다는 함께 라는 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고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해왔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도시형 도금공장 롤모델을 만들다
정 대표는 2천 년대 들어서기 이전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기억할 때 가장 싫었던 것은 도금 현장의 열악한 작업 환경이었다고 한다. 고약한 화학약품 냄새를 참아가며 장화와 앞치마를 착용하고 100% 수작업인 작업 과정이다. 세월이 흘러 다른분야는 변했는데도 도금 생산현장은 그대로였다. ‘3D업종’이라는 꼬리표를 뗄수 없는 가장 큰 요인이자 다음 세대 우수기능인력을 키우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저는 명장입니다. 후배들을 위해 무언가 본보기가 될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커졌어요. 지난 2019년 신사옥을 건축을 준비하면서 도시형 도금공장을 구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뉴욕과 동경 한 복판에도 경쟁력을 갖춘 도금공장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니겠냐고 작심하고 7층 건물 지하엔 폐수처리시설, 3, 4, 5층엔 도금 시설을 각각 구축했다. 시대흐름에 맞춰 스마트공장으로 추진했다.
올 초 입주를 한 신사옥 내에는 각 공정의 주요설비마다 한 두 명의 전문 인력이 공정모니터를 작동하여 자동화설비를 조정한다. 전 공정이 자동화되어 도금 코팅 건조 등의 공정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층에서 층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돼 있다. 귀금속 도금라인에는 수평로봇과 다관절로봇이, 코팅라인에도 다관절 로봇이 작업자의 입력정보를 그대로 수행한다. 대도도금의 도시형공장 설비와 기술의 절정은 옥상의 설비에서 빛을 발한다. 빌딩 옥상에 대기배출시설을 구축했다. 1차 정화된 공기를 다시 한번 물로 걸러내는 이중처리 설비 시스템이다. 환경기준치 합격 수준 그 이상의 고도화된 설비로 이는 도시형 도금공장의 모범사례를 만들고자 한 정 대표의 강한 의지였다.
대지 150평, 건평 600여 평의 지하1층 지상7층 건축비만 무려 50억 여 원이 들어갔다. 장비 하중까지 계산하다보니 일반 건축의 1.5배가 들어간 셈이다. 증과 층 사이에 벌집구조의 새로운 공법도 적용시켰다. 자동화 설비에 투자된 비용도 50여억 원에 달한다. 왜 비싼 땅에 과도한 비용을 들인 공장을 지었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정 대표의 대답은 의외로 소탈하다.
“삶의 가치를 따질 때 돈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저로서는 업계에 후배들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도금공장 하나 남기고 싶을 뿐입니다”
국내에서는 빌딩 숲에 자동화설비를 갖춘 도금공장이 대도도금 한 곳 뿐이다.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나 전자 관련 도금공장은 많지만 금속장신구 도금공장은 전무하다. 정광미 대표는 타 업계 도금설비 시스템을 벤치마킹하여 금속장신구 도금공장을 일궈내는 새로운 역사를 쓴 주인공이 됐다. 그는 도금업계 CEO로서 명장으로서 꼭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정광미 대표의 삶과 경영
명장으로서 도금에 대한 어떤 매력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이고 그 결과물을 소비자들이 몸에 지니거나 자신있게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 묘한 희열같은 걸 느낍니다. 대중교통 안에서도 우리 회사가 도금한 패션제품을 들고 다니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 내가 만든 제품으로 그들이 만족을 느끼고 동시에 저도 만족하니 정말 좋습니다.
35년 전 도금공장에 입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공부를 제대로 했겠지요. 아마도 공학도의 길을 걸었을 겁니다, 우주항공산업의 연구원 중 한 사람으로 기술개발에 집중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주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지 않을까요?
‘광미’라는 이름은 여성들에게 많아요. 때로는 불편하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을 거 같아요?
맞아요. 과거 시골에서는 교통편이 불편해서 출생신고를 마을 이장이 대신하곤 했는데 그때 오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집에서는 ‘광민’이라고 불렀는데 중학교 입학할 때가 돼서야 호적 에 이름과 나이가 다르다는 걸 알았어요. 가끔씩 저를 형인 정광수 대표 아내로 착각하는 분들도 있고 여성 대표인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아니라며 놀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운명이 아닐까 싶어요. 도금이 그야말로 광내서 아름답게 만드는 일인데 ‘광미’와 딱 맞아 떨어지거든요.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가 공동대표입니다. 대표가 두 명이면 직원들 입장에서는 불편한 점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표면적으로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대표가 한 명일 때보다는 어느 부분에서든지 애로점은 있을 거라고 봅니다. 다만 형님과 저는 각각의 업무분담을 정확하게 구분지어 일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나는 공장장이다’라는 마인드로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떠들고 웃는 편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공동대표 회사라는 이유 때문에 경영상의 문제점이나 분란은 없었으니 직원들이 회사와 경영진을 신뢰하는 것 같아요.
도금업계에서는 보기 드믈게 직원들 중 2030 젊은 세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희 직원 50여명 중 70%가 MG(엠지)세대들 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젊은 인력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생산현장 환경변화도 영향을 미쳤지만 중소기업계약학과를 통해 우수인력을 채용하는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업계 미래를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현상이고 우리 회사가 그 트랜드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지난 달 새로운 가방 브랜드 파프(faf)를 론칭했습니다. 패션분야로 사업을 확대하는 건가요?
우리의 핵심사업은 예나 지금이나 도금완제품입니다. 파프 론칭은 사업확장의 의미보다는 우리도 명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도전입니다. 가방엔 귀금속장식이 필수이자 얼굴이거든요. 우리의 기술로 해외시장에서 브랜드가치를 키워보겠다는 야망이 있습니다,
이 원고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이 발행하는 월간 <기업나라> 2021년도 `11월호에 박창수 기자/작가가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