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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앞치마를 두르지 못하겠다는 건가?

왜? 앞치마를 두르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간 어떻게 지냈어?”

오랜만에 가까운 친구나 지인을 만나면 으레 이런 인사를 하기 마련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먹고 사느라고 늘 바빴지”,

열심히 일했지. 일해야 먹고 살잖아”,

놀면 누가 밥 먹여 줘? 그러니 한 푼이라도 벌려고 움직이지등등.

 

어찌된 일인지 답변 속에는 하나같이 ’, ‘먹는다는 언어가 포함돼 있다. 더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그것도 사오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한 끼 식사를 의미하는 은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70년대 고향에서의 유년시절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동네 어른들은 자신보다 윗사람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늘 정해져 있었다.

진지 드셨시유

저녁 잡쉈어유

 

과거에는 하루 세끼 끼니를 다 챙겨먹기 힘든 사람들이 많았으니 인사가 밥을 챙겨먹었느냐는 게 최고의 덕담이었던 것 같다. 쌀이 부족해서 수제비와 칼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을 이틀이 멀다하고 해먹는 가정들도 적지 않았다. 잘 아는 지인 중 한 사람은 서울 산동네에 살았는데 매일 저녁때만 되면 어머니가 국수집에 가서 국수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그게 너무 싫었다고 회상한다.

중학교를 다니던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도시락이 온통 보리밥만 가득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나와 나이가 각각 일곱 살 아홉 살 가까이 차이나는 누님들은 칼국수, 감자, 고구마, 보리밥을 유난히 싫어한다. 그만큼 쌀밥 보다는 잡곡을 비롯한 밀가루 음식과 흔한 고구마와 감자를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하루 세끼를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들어 서로를 염려해주던 시대는 먼 옛날이 됐다. 쌀밥이 당뇨와 비만의 원인이라고 해서 온갖 잡곡을 다 넣어서 먹는 게 일반화 됐다. 밥을 먹기 싫어서 빵과 피자를 먹고 국수나 라면 대신 더 맛있다는 스파게티와 파스타를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하는 얘기도 늘 똑같다. 건강을 위해서는 하루 세끼 규칙적인 식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음식의 종류는 다를 수 있지만 무엇을 섭취하든 우리는 아침 점심 저녁 세끼 챙겨 먹는 것을 하루 일과 중 매우 중요한 법칙으로 여기면 살고 있다. 세끼 중 두 끼만 먹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도 나머지 한 끼는 간식으로 대처하거나 술자리 음식으로 해결한다.

 

건강에 관한 한 현대인이 전적으로 의존하는 의사의 조언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먹어서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감은 물론이고 먹는 즐거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먹고 사는 일, 가장 기본적인 이것이 큰 문제가 되는 이들이 있다. 다름 아닌 나이 들어가는 대한민국의 남성들이다. 적어도 50세 이상의 한국 남성들이다. 그들 중 대부분이 주방에서 밥 짓기를 거부하고 또 그것은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내의 몫, 여성의 몫이라고만 여긴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문화로부터 탈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대구분에서 보통 신세대로 구분되는 1970년 이후에 출생한 남성들은 가정에서의 역할분담에 대해 굳이 성을 앞세우진 않는 편이다. 물론 신세대와 X세대 M세대 남성들 중에도 부모세대로부터 가정 내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 세대 기성세대 유신세대 386세대 남성들은 거의 대다수가 앞치마를 두르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의 뿌리가 내면에 깊이 박혀있다. 밥솥과 요리기구가 스마트해진 세상이지만 그들은 주방에 들어가서 밥 짓고 요리하기를 거부한다.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검색하면 초등학생도 알아서 할 수 있건만 그들은 못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심각한 것은 이는 성별 역할을 떠나서 노년기 개인의 삶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 오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강의 현장에서 만나는 시니어들의 80% 이상이 여성이다. 10년 전에는 50대가 가장 많았다면 지금은 60대 여성이 대세다. 물론 5070대들도 적지 않지만 아무래도 베이부머 세대들이 인구 수도 많고 시기적으로 인생2막을 준비하는 이들이 많아서인 거 같다. 그들에게 꼭 한번은 들려주는 얘기가 있다.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물론 아닌 분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배우자를 죽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정은 많이 들지 않았나요? 그래서 싫으나 좋으나 늘 옆에 있게 되지 않나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반드시 남편들에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밥하고 요리하고 가전제품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세요. 그거 안가르쳐 주면 정말 나쁜 마누라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눈을 감을 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만약에 아내가 아프거나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혼자 남은 남편은 어떻게 살죠? 요즘 자식이 부모 모시고 사는가요? 가사 도우미가 온다하더라도 날마다 하루 세끼 밥 차려주나요? 남성들이 앞치마를 둘러야 하는 이유는 지극히 당연하고 분명합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일이죠

 

이미 2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며느리가 밥 차려드릴 때만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도 그때 더 잘 모시지 못해 후회되고 마음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은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노년기를 보냈다. 밥하고 세탁기 돌리는 그것을 직접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존하셨더라면 95세이니 그 연령대의 어르신들이야 대다수가 그랬고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문제는 그 세대보다 자그마치 3040년이나 다음세대인 지금의 5060 세대들이 여전히 주방일과 가사에 무관심하거나 여성의 일로만 여긴다는 것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번쯤 스스로에게 질문해봐야 할 일이다.

 

나는 왜 앞치마를 두르려고 하지 않는가? 앞치마가 그렇게도 무서운 걸까?”

 

* 이 원고는 박창수 작가의  에세이 <유쾌하게 인생을 즐기는 53가지> 중에 편집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