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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흰 쥐는 귀엽기라도 하지”

“흰 쥐는 귀엽기라도 하지”

 

 

“염색 좀 해유”

“염색한다고 젊어져. 그저 눈속임이지. 다시 희끗희끗해지는 걸 왜 돈 들여서 염색을 혀. 나는 싫구먼”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 이라는 디. 뭐 맘대로 하시유. 나를 위해서 그런 말 해유? 큰 애 읍내 간다는 디 같이 가서 이발소도 가고 와이셔츠도 좀 사고 그러면 좀 좋아유”

“됐구먼. 조카가 결혼하는 거지 내가 장가드나. 하여간 젊으나 나이를 드나 다들 문제여. 엉뚱한데다 왜 돈을 써. 그냥 있는 대로 생긴 대로 사는 겨. 꾸민다고 팔자가 뒤바뀌는 것도 아니거늘 ...,”

“알았시유. 당신 맘대로 혀 유. 아주 뭔 말을 하기가 무섭다니까.”

오 여사는 이쯤에서 말을 끝내는 게 더 이상 큰 소리 안 나오 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황소고집에 한 번 화가 나면 무서운 남편인지라 적당한 선에서 입을 다무는 게 좋을 일 이었다. 더욱이 아들 내외도 있는데 사소한 일 가지고 노인네들이 집안 분위기 싸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싶은 거였다. 평생을 고집불통 남편과 살아온 자신의 처지에 은근슬쩍 화가 치밀었다.

백발이 가깝게 된 남편에게 염색을 권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다 서울 사는 친구들의 카톡에서 그녀들이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해보였다. 일단 머리숱이 많고 검으니 보기가 좋았다. 물론 경자네 남편은 대머리인데 가발을 썼다는 것을 언젠가 다른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지만 설령 가발을 썼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나이 들면서 자기관리를 잘하는 것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남편은 자기 몸 꾸미는 것에는 질색을 하는 사람이었다. 촌에서 젖소 키우는 사람이 멋 부려서 뭐하냐는 식이었고 외모 꾸민다고 해서 사람 자체가 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십년이 넘은 양복을 마치 보물인양 입고 다녔다. 언젠가 작은 아들이 구두를 사라고 티켓을 선물했는데도 전혀 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결국엔 큰 아들에게 주기도 했다. 아주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에 ‘짜증’ 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던 걸까? 읍내 볼일 보러 나가던 아들이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넸다.

“아침부터 뭐 안좋은 일 있으세요?”

“일은 뭔 일. 니 아버지 때문에 그려. 낼 모레 병식이 결혼식장 가봐야 하잖여. 큰아버지라는 사람이 좀 깔끔하게 하고 가야 되는데..., 그래서 이발소 가서 머리 염색도 좀 하고 와이셔츠도 새 것 하나 사 입고 오라고 했더니 되레 나한테 성질을 내는구먼.”

“아버지 본래 옷 사는 거 싫어하고 얼굴에 뭐 바르는 것도 안하시잖아요. 평생 그렇게 사셨는데 지금 와서 그 성격이 바뀌시나요.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아- 내가 같이 다니기 창피하단 말여. 맨날 구닥다리 옷만 입고 그러잖어. 쓸데는 쓰고 살아야지.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 왜 그렇게 사는 지 모르겄구먼”

“정초부터 얼굴 붉히지 말고 맘 푸세요.”

“됐어. 니 아버지 말대로 엉뚱한데 왜 돈을 써. 됐구먼. 어여 다녀오기나 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 한다더니 오 여사가 딱 그랬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아들한테 풀어버린 꼴이 됐다. 아들에게 괜한 말을 했다 싶어 내심 미안함마저 들었다.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며느리는 아들이 차를 몰고 나간 후에야 그녀의 맘을 달래주려는 듯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어머니! 점심에는 칼국수 해볼까요. 동치미가 맛있게 익었어요.”

“그려. 명태 대가리로 육수 내서 끓이면 맛있지. 내가 반죽해서 밀어 줄게”

“저야 좋죠. 반죽은 그냥저냥 되는데 밀어서 펴는 건 아직까지도 어려워요. 어머니 솜씨를 못 따라가죠. 아버님 때문에 속상하신 거죠? 예전에 저희 친정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엄마가 옷 사 입으라고 돈 주면 그것으로 저희들 신발 사 주고 용돈 주시고 그러셨어요. 근검절약이 몸에 베여서 그래요. 와이셔츠는 성민 아빠가 사 올 거예요. 꼭 사오라고 당부했어요.”

“잘했구먼. 내가 미리 사다 놨어야 혔는 디. 와이셔츠 값은 내가 주마”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자식이 돼서 와이셔츠 하나도 못 사드리나요. 봄 되면 제가 아버님 모시고 청주 나가서 옷 좀 사드릴게요. 아주 젊게 보이는 옷으로요. 아셨죠?”

그나마 아들 내외라도 함께 있어서 이렇게 맘을 풀어주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먹은 맘 오래 가지 않는 쿨한 성격의 오 여사는 분위기를 긍정모드로 전환시키고 칼국수 반죽에 돌입했다. 손으로 밀가루 반죽 덩어리 주무르기를 반복한 후 홍두깨로 열심히 밀었다. 남편에 대한 야속함의 찌꺼기까지 속 시원하게 밀어냈다.

점심 때가 되자 구수한 육수 냄새가 입맛을 다시게 하는 따끈한 칼국수가 상으로 올라왔다. 남편은 후루룩 후후룩 한 그릇을 맛나게 비우고 나더니 며느리가 더 권하자 거절도 하지 않고 반 그릇은 더 먹었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오 여사는 식성 좋은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머리만 하얗게 보일뿐 주름살도 없이 윤이 반짝반짝 나는 이마는 일흔 셋이라는 나이가 대체 어디로 갔는 지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남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왜 쳐다보는 겨. 얼굴에 뭐 묻었어?”

“보긴 누가 봤다고 그려유. 참말로.”

“그런 말 말어. 내 머리카락 부러워하는 놈들도 많어. 은발이 뭐 어때서?”

그러자 며느리도 시아버지를 ‘은발의 신사’ ‘멋진 그레이’라고 치켜세웠다. 오 여사로서는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남편은 분위기가 업 되어서 평소 답지 않게 자화자찬 지경까지 가는 게 아닌가.

“올해가 경자년(庚子年) 쥐띠란 말이지. 그것도 하얀 쥐라고. 내가 무슨 띠여. 부지런한 쥐띠잖여. 게다가 머리도 반백이니 올해야말로 지대로 나의 해 이구먼. 그러니 다들 기대해 보라구.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구먼. 허 -허”

오 여사로서는 참으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엇다. 그래서 남편을 향해 펀치를 날렸다.

“흰 쥐는 귀엽기라도 하지”.


- 낙농육우 1월호 /글 박창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