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사람을 만나라
아침 여덟시! 초인종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렸다. 드디어 그리스 아테네 민박집에 제대로 도착한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갑게 맞아주는 여주인은 60 중반 쯤 돼 보였다. 낭랑한 목소리는 수더분한 아줌마라는 느낌 보다는 나름 존재감이 묻어나는 강직하면서도 지성미가 적잖게 입혀진 그런 안주인의 이미지를 드러냈지만 단지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온몸에서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는 느낌 그 자체였다.
전날 저녁 불가리아 소피아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어딜 가든 나에겐 내내 불안감이 쫒아 다녔다. 신용카드와 유로가 든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으니 외국여행에서 늘 강심장을 드러냈던 나였지만 한 없이 가벼워진 주머니의 가난한 주인이 되고서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안내해준 방에 짐을 대충 풀고 거실로 나와 안주인이 따라준 커피를 마시면서 소피아에서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잠옷 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나타나더니 서성거렸다. 남편이라고 보기에는 좀 젊어보였다. 그녀가 “김 선생님은 오늘은 어디 가실 거예요? 파르테논신전은 아직 안 갔죠? 야경도 멋있는데..., ”라는 말을 한 다음에야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여행객이었음을 알았다.
성이 ‘김’이라는 것과 같은 여행객이라는 사실 밖에 모르는 그를 다니 만난 건 그날 저녁이었다. 2박 3일의 아테네 체류시간을 나름 알차게 보낼 요량으로 밤새 버스를 타고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낮엔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한국식당을 찾아가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오자 김은 아침에 본 그 모습 그대로 거실을 서성대고 있었다.
“혼자 오신거죠? ”
“네.”
“나이 들면 혼자 다니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대단하시네요. 남자 혼자서 해외여행 다니는 분들은 좀 보기 드믈던데 ...,”
“저는 혼자 다니는 게 편하던데요. 꽤 오래됐습니다. 여기저기 쏘다니기 시작한 지 한 이십년 가까이 됩니다. ”
“그러시군요. 올해 어떻게 되셨어요?”
“쉰 넷입니다. 좀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죠. 머리가 희끗해서 ”
“그럼 뱀띠인가요? 어! 나도 뱀띠인데 ...,”
“그래요? 어쩐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와- 반갑습니다. 여기 와서 동갑을 만나다니. 이거 참 특별한 인연이네요.”
“그렇네요. 저도 반갑습니다. 또래 만나기는 처음입니다. 하 하 ”
집이 경주라고 했다. 친구와 함께 왔는데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셔서 종일 숙소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 거렸단다. 그러더니 한잔 하러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가진 것은 없어도 사람과 어울리는 거 좋아하기로는 이등하기 싫어하는 내가 아닌가. 그는 대학 동기인 친구와 이태리로 여행을 왔는데 계획에도 없던 아테네 여행을 감행했다는 거였다. 김과 그의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뱀띠 동갑내기 셋의 아테네에서의 술판은 이렇게 시작됐다.
만나면 뻔한 한국 남자들의 대화 소재인 고향, 학교, 군대, 가족, 일 등의 대화가 이어졌고 나 못지않게 사람에 대한 낯가림이 없는 김의 호탕한 성격이 술자리의 분위기를 시원시원하게 이끌면서 우리는 새벽 두시 반까지 자그마치 다섯 병의 와인과 네 가지 안주를 해치웠다. 오죽하면 모든 손님들이 자리를 비우고 문을 닫아야 할 타임인데도 불구하고 종업원 중 누구하나 인상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레스토랑으로서는 연거푸 이틀 동안 최고의 매상을 올려준 한국 아저씨들이 고마웠을 터이다.
미리 지갑분실 사건을 빌미로 ‘노 머니’를 고백하긴 했지만 마음속은 부담감으로 인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그나마 미안함을 덜어보려고 인근의 심야 커피점에 가서 커피를 사는 것으로 그날의 일정은 마무리 됐다. 물론 연락처도 주고받고 함께 인증샷도 빼놓지 않았다. 그들은 이튿날 다시 로마로 떠났고 나는 하루를 더 머무른 후 귀국길에 올랐다.
혼자서 낮선 땅을 휘젓고 돌아다닌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보니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파리의 숙소에서는 아들 같은 대학생들에게 담배를 선물받기도 하고 이른 새벽 파리의 후미진 외곽의 지하철역 티켓발매기 앞에서는 동전이 없어서 티켓을 발매하지 못하고 어쩔줄 몰라 하는 나에게 십시일반 동전을 모아준 남미에서 여행을 온 고마운 여대생들도 있었다. 스페인 기차에서 만나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이란의 대학교수, 십년간 재직했던 은행을 퇴직한 후 미국 유학을 앞두고 지구 반 바퀴를 돌던 30대 한국여성, 동경 코리아타운에서 만나 함께 술도 마시고 이메일로 연락하던 두 살 아래 일본의 젊은 친구, 10년 새 세 번이나 만나 이젠 편안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터키 이스탄불의 민박집 여주인 현숙씨와 그녀의 남편 이스마엘 그리고 현지 수퍼마켓 주인이자 동갑내기 친구 등등 . 모두들 기억 속에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다시 또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다.
아테네서 만난 이후로 문자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김형’ 으로 부르는 H도 그 중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동갑나기인데다 성격 또한 화통해서인지 그와 그의 친구 J씨도 함께 소주 한 잔 나눌 날이 머지않은 날 현실이 될 것이다.
20대부터 70대까지 요즘 한국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반드시 여행이라는 것이다, 3년 전 방송 원고를 준비하고자 또 2년 전 책을 쓰고자 직접 100여 명에 가까운 이들의 버킷리스트를 들어본 결과 알게 된 사실이다. 20대 30대들은 단순이 여행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선호하는 외국의 어느 지역에서 ‘한 달 간 살아 보기’. ‘1년 간 살아 보기’를 버킷리스트 세 가지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최근들어서는 시니어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는 분위기다.
여행은 국내든 해외든 유명한 곳이든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이든 떠나는 자의 선택이고 그들만의 로망이다. 이미 여행관련 책을 썼을 만큼 여행마니아로서 감히 권유하고 싶은 게 있다면 여행길에서 사람을 만나라는 것이다. 남녀노소 누구든 여행길에서 만나 사람들은 인연이고 친구가 된다. 설령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비우고 떠난 그 길에서는 모두가 대화와 몸짓으로 통하고 미소만으로도 언어의 벽을 넘는다. 정치와 이념의 논쟁도 없고 학문의 깊고 얕음 따위의 비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과 사람, 자유와 소통, 미소와 행복이 존재할 뿐이다.
직접 스케쥴을 짜고 내 맘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여행길을 선택하면 어떨까? 굳이 내가 누굴 만나려 하지 않더라도 그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막연한 기대감은 결코 기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멋진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박창수 작가의 책 <유쾌하게 인생을 즐기는 53가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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