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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생은 생방송

50+ 인생은 생방송이다

 

 

목이 간질간질하다. 기침이 나올 것만 같다. 원고는 이제 두 번째 페이지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곱 페이지를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이럴 때일수록 긴장은 더 되고 목도 더 가라앉는다. 기침을 참다보니 목에서 끄억 거리는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순간 프로앵커인 이지연 선생님이 눈치를 채셨나보다. 대본에 없는 대사로 치고 들어와서 나에게 한 숨 돌릴 시간을 주신다. 그 사이에 침을 한번 삼키며 목을 가다듬었다. 가까스로 그날 방송도 큰 실수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이 날이 아니더라도 갑자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나 스스로 느끼면 되레 긴장감을 느끼면서 다음 원고도 더 더듬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이럴 때도 마찬가지로 구세주인 이 선생님이 위기를 모면시켜준다.

생방송이다. 일주일에 한 번 씩이다. 10여 분의 방송시간이 끝나면 마치 지옥 훈련에서 벗어난 순간처럼 온몸이 풀어지고 그야말로 아무생각이 없다. 빨리 방송국을 벗어나 담배 한 개피로 여유를 찾으려고 한다. 라디오 생방송을 한 지 어느새 11년이 됐지만 심적 부담과 불안감은 여전하다. 그러니 방송만 끝나면 마치 일주일중 5일이 지나고 토요일을 앞둔 금요일 저녁처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실은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인데 말이다.

방송이 본업은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얘기는 많지 않다. 다만 눈에 보이는 TV이든 목소리만 들리는 라디오이든 생방송은 그것으로 끝이다. 녹음이나 재촬영처럼 잘못되면 다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는 순간 이미 그 말은 전파를 타고 퍼져나갔기에 다시 되돌릴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방송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신경을 곧추세워가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인생은 어떨까? ‘인생이라는 두 글자만 생각하면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다는 진리 속에 숙연지기도 하지만 나이를 전제로 그 의미를 되새길 때는 느낌이 조금 달라진다. 80년을 산다고 하자.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는 설령 잘못을 하고 실수를 해도 똑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어리니까 몰랐으니까 경험이 없으니까 웬만한 일은 그렇게 넘어간다. 이 삼 십대는 다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경제적으로 법적으로든 아니면 인간적인 도리로든 그 어떤 방법으로든.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청년이니까' 소리를 듣는 40이 되기 전 까지의 젊은 날의 실수나 잘못은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할 해서는 안될 아주 큰 죄를 저리르지 않는 한 용서나 이해로 마무리 될 수도 있다.

불혹(不惑)’이라고 말하는 40세가 넘어서면 세상은 우리에게 그렇게 관대하지 않다. 마흔 이 넘어서 우리 사회의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언행을 하거나 공공질서를 무시하면 법적으로 유죄 무죄를 따지기 이전에 화살이 먼저 돌아온다.

저 나이에도 저 짓을 하고 다녀

사십이 넘었는데도 철이 덜 들었어. 한심한 인간이군

나이 오십이 넘어서 유사한 잘못을 저질렀거나 추한 꼴을 보였다고 치자. 이때는 비난의 강도가 한결 높아진다.

왜 저러고 살아.”

저 사람 철들기는 글렀어. 저 정도면 제 인생 말아먹은 거야

나이가 들수록 가정과 직장에서의 의무나 도리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감은 더욱 커진다. 사회는 어른으로서 어른다운 언행과 책임감 있는 면모를 요구한다. 게다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역량이 커서 대중의 시선을 받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 보다도 더 높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바로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하는 게 노년기 세상살이다.

그런데 아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은 이런 기대치에 되레 반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모범이 되어야 하는 어른,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야 할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제 모습을 다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다. 골프장에서 손녀딸 같은 여성캐디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으려 하고, 공적 자금을 빼돌려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정치활동 과정에서 초등학생도 저건 아니라고 꼬집을 수 있는 언행을 그것도 당당하게 드러낸다. 또 개발정보를 빼돌려 탐욕스럽게 재산을 불리고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하고, 사장은 직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일이 하나같이 50대 이상의 시니어들 그것도 사회지도층에게서 일어난다.

꼭 사회지도층이 아니어도 비난의 화살을 피해갈수 없는 어른들 또한 부지기수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마차 하차승객들을 떠밀면서 승차하는 이들, 버스 안에서 전동차 안에서 마치 방송이라도 하듯이 큰소리로 사적인 통화를 하는 이들, 임산부좌석에 앉아서 자는 척하며 버티는 이들, 자기가 가진 재산에 비하면 손톱만큼도 안 될 노령연금을 타기 위해 자식과 친척들 앞으로 재산을 옮겨놓는 이들, 쇼핑센터에서 식당에서 직원들의 뺨을 때리고 무시하는 이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하나같다. 문제가 터지고 나면 그제서야 내가 실수했고 내 잘못이 크니 용서를 구한다면서 마음이 아닌 고개만 숙이는 어른들이다. 이러고도 시니어가 이 나라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국민이고 어른이니 나에게 인사를 하고 공손하게 대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고전같은 속담을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는 어른들이 너무도 많다는 게 21세기 초입인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시니어는 우리 사회의 어른이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산업역군이었고 세계에서 7개국뿐인 3050클럽 국가를 만든 주인공들이다. 이런 소중한 자부심을 어른답지 못한 언행으로 한순간에 추락시킬 것인가? 시니어의 한 사람인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사회의 모든 시니어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쯤은 진지하게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흔한 말로 내로남불이란 신조어가 있다. 내가 하는 언행은 문제가 없는데 같은 말 같은 행동도 타인이 하면 거짓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흉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왜곡된 마인드 속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노년기는 실수해도 용서받는 청춘이 아니다. 죄를 범하고도 구속되지 않는 아동, 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형사미성년인 13세가 아니다. 잘못됐으면 다시 바로 잡아갈 수 있는 방송의 녹음이나 사전녹화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인생의 생방송을 하는 중요한 시간임을 인지해야 한다.

 

@박창수의 <유쾌하게 인생을 즐기는 53가지> 중에서